흑룡강 (1976) 영화

1976년작 “흑룡강”은 소위 권격 영화라고 불리우면서 무예 장면을 중시한 활극 영화들이 나오고 있던 70년대 후반에 나온 한국영화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잘 걸맞는 영화로 볼만 합니다. 무예 장면을 중시한 구성, 시대와 배경이 애매해 보이지만 적당히 20세기초 만주지역 어딘가의 무법 지역을 배경으로 잡은 것 등등 당시 유행에 걸맞아 보였습니다. 게다가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는 흐름, 싸움 장면과 갈등을 넣고 싶다면 과감하게 납득할 수 없는 괴이한 생각을 집어 넣는 것까지 이 무렵 한국영화의 중저예산 권격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포스터 - 1976년도 최신초거작! 황정리의 이름이 한국에서 쓰던 다른 이름인 황태수로 나와 있습니다.)

영화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 보자면, 만주의 한국인 정착촌에는 무예를 연마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는데 주인공은 무예 연마를 금지 당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너무나 무예를 연마하고 싶었고 또 재능도 특출났기 때문에, 결국 정착촌 촌장의 뜻을 거슬러 그곳을 떠나서 무예를 배우기 위해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일본인 조직에서 무예를 배워 중국인, 한국인 무예가들을 대립하는 처지가 되고, 일본인의 철도 건설 계획을 거부하는 무리들을 두들겨 패 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한국인 정착촌에서는 주인공을 물리치기 위해, 정식으로 무예 연마를 배운 사람들 중에 일인자격에 해당하는 주인공2를 보낸다는 이야기로 흘러 갑니다.

의외로 줄거리의 핵심은 제법 괜찮았습니다.

무예에 뛰어난 재능은 있었지만 무예를 배우는 것을 거부 당해서 어깨너머로라도 배우려고 애쓰는 주인공이라든가, 결국 그것 때문에 비뚤어져서 반대파 조직으로 흘러간다든가 하는 것은 어찌보면 많이 보던 이야기이기는 해도 괜찮게 표현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은 반대파 조직으로 흘러간 뒤에도 조직을 위해 싸운다거나 원래 속했던 무리에 보복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고, 그냥 무예가 뛰어난 자라면 누구든 제압해서 제일이 되겠다는 목표 자체에만 몰두하는 쓸쓸하고 외톨이인 인물로 나옵니다. 이것도 재미있고 개성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주인공에게는 애초에 무예를 가르치지 않았느냐 하는 이유도 중반에 나오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상한 떠돌이 무예가, 결투 전문 싸움꾼이 되어서 이곳저곳 다 헤집고 다니는 주인공이 결국 일본의 철도 건설 사업을 위해 봉사하는 모양이 되어 중국인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자, 주인공의 고향인 한국인 정착촌에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수제자를 파견하면서 제2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구성도 좋은 전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떠돌이요 어깨너머로 배운 인물이요 잡다한 무예를 익힌 인물이요 외롭고 반항적인 제1주인공과, 수제자이고 모범생이고 의롭고 착한 제2주인공이 대립을 이룬다는 구도도 괜찮았습니다.

중국계 무협물을 보면, 이를테면 “소림사에서 최고의 무술을 익힌 사람이 있었는데, 소림사의 이상한 계율 때문에 소림사를 뛰쳐나갔고 지금 무림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어서,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소림사에서는 수제자 3명을 파견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20세기초 만주를 배경으로 해서 그럴싸한 대립구도로 잘 나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1주인공은 이 무렵 한국 권격물에서 발차기의 달인으로 명망 높았던 카사노바 왕, 곧 왕호이고, 제2주인공은 성룡 영화의 무술 뛰어난 악역으로 지금까지도 알려진 편인 황정리이니, 배우 섭외도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기대될만한 점도 있고, 실제로 영화를 봐도 볼만한 점은 없지 않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음악도 여러가지로 변주되어 나오는 주제곡이 약간 이탈리아산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 같은 느낌도 슬쩍나는 것이 적어도 초반에는 들을 만했습니다.


(제1주인공과 제2주인공의 결투)

그렇습니다만 매끄러운 영화라고 하기에는 구멍도 많은 영화였습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로 싸움 장면이 많은 영화인데 싸움 장면이 별로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싸움 장면이 아주 못 만든 것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70년대만해도 한국영화 속 격투 장면 중에는 도대체 누가 누굴 때리는 지, 누가 싸움을 잘하고 누가 못하는 지도 알아 보기 힘든 영화도 결코 찾아 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 영화에 비교해 보자면, 이 영화의 싸움 장면들은 월등히 낫긴 했습니다. 싸움 장면이 싸움처럼 보이고, 싸움 장면에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다는 느낌도 났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정말 싸움 장면이 재밌거나 신기하게 보일 정도로 잘 연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타격이나 위력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화면으로 담겨 있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싸움 방식의 소재도 특별한 것이 부족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중반에 제1주인공을 맡은 왕호가 이 조직 저 조직의 근거지를 돌아다니면서 “한번 겨뤄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차례로 그 조직의 일인자를 두들겨패 버리고 표표히 떠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도장 깨기”를 하는 장면인데, 이런 장면에서라면 센 주먹을 주특기로하는 조직을 한번 제압하고, 발차기가 뛰어난 조직을 한번 제압하고, 이상한 권법을 쓰는 조직을 또 제압하고 하는 식으로 다채로운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올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정형화된 70, 80년대 한국 권격 영화 싸움 장면을 여러번 반복할 뿐입니다.


(남의 도장에 찾아가 대결하고 싶다고 하는 왕호)

영화답게 과장해서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솜씨를 보여 주는 장면도 거의 없습니다. 굳이 하나 꼽자면 제2주인공을 맡은 황정리가 칼 들고 설치는 시정잡배를 제압하면서 “나는 맨손으로만 싸운다”고 하면서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연출은 좀 싱거운데다가 너무 짧아서 그냥 이런 장면도 있네, 하고 잠깐 지루함을 달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입니다.

유일하게 뭐든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싸움 장면이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사실 싸움 장면이 아니라 무예를 단련하는 연습 장면인데, 이것은 안타깝게도 너무 황당해서 재밌다기 보다는 괴이한 느낌입니다.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제1주인공 왕호는 여러 조직의 무예 수련단체를 제압하다가 어느 일본인 앞잡이인 무예 수련단체 스승의 실력이 높은 것을 보고 그에게 무예를 집중적으로 배우기로 합니다. 이 일본인 앞잡이 스승은 70년대 한국 영화에서 힘센 대머리 악당 역할로 자주 출연했던 조춘이 맡았습니다.

조춘은 왕호에게 “마음의 눈을 뜨는 법을 익혀라” 어쩌고 하면서 수련을 하라고 합니다. 비슷한 홍콩 영화였다면 방에서 새를 풀어 놓고 눈을 감은 채로 소리를 들으며 날아가는 새를 손으로 잡아 채거나, 아니면 좀 웃기게 스승이 밤이나 대추 같은 것을 던지면 그것을 눈을 가린 채로 피하는 수련을 할 법한 대목입니다. 좀 특이하게 한다면, 무슨 나무로 된 사람 모양과 싸우는 연습을 한다거나 이상한 기계장치로 몸을 단련하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 “흑룡강”에서는 그런 뭔가 품이 드는 수련 장면을 찍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마음의 눈을 뜨는 법을 익히는 수련 장면에서 사용하는 도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배경이 무슨 높다란 절벽이나 깊은 동굴 같은 특이한 곳도 아닙니다. 그냥 동네 약수터 근처에서 자주 볼법한 흔한 야산입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마음의 눈을 뜨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까? 무엇일까요? 뭐나면, 주인공이 눈을 가린 채, 산 속에서 막 뛰어다니게 하는 겁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심어져 있는 소나무에 부딛히고 자빠집니다. 아프겠지요. 그렇지만, 뼈를 깎는 수련 도중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또 일어나서 눈을 가린채 산에서 달리고 나무에 부딛혀 자빠지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야산에서 눈가리고 뛰다가 나무에 부딛혀 자빠지는 것을 몇 번 보여주며 대단한 수련이라고 하는 모습은 보고 있으면 매우 헛헛합니다. 게다가 이 모습을 조춘의 나래이션과 함께 느린 동작으로 비장하게 보여 주기까지 하니, 더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힘이 빠지는 요소로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옛날 한국 영화 속 권격 영화에 나오는 대충 막 만든 여자 주인공 인물 그대로라서, 대사, 성격, 동작이 아무래도 재미가 없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제1주인공 왕호와 약혼한 인물로 나와서 왕호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고 왕호는 방랑의 길을 떠난 뒤에도 여자 주인공을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럭저럭 많이 보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에 들어서서 제2주인공 황정리 중심으로 흘러 가자, 여자 주인공은 난데 없이 자신은 원래 황정리를 좋아 했고, 그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소리를 합니다. 작가 진이 그냥 여자 주인공이라면 남자 주인공과 뭔가 엮여야 하는데, 이 영화 줄거리는 독특하게 제1주인공과 제2주인공 둘이 대립하며 나오는 구성이니까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다 엮어 보자고 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둘 다에 가까워진다는 소재 자체가 아주 말이 안 되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제1주인공 왕호는 반항적이고 감성적이며 말이 많은 인물로서 공감, 동정,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그에 비해 제2주인공 황정리는 의롭고 모범생이고 착하고 말이 없는 대신 믿음직하고 여자 주인공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려고 합니다. 서로 다른 느낌이지만 매력이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끌릴 수 있기는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제2주인공 황정리와 여자 주인공은 함께 제1주인공 왕호를 찾아 떠나는 모험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가까워질 여지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황정리와 왕호가 서로 싸우다가 누구 하나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여자 주인공이 말리려고 한다는 마지막 갈등에 돌입하는데 이것도 좀 더 치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런 이야기 거리를 그럴 듯한 느낌으로 풀어 내기 보다는 여자 주인공이 난데 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실 선생님을 저는 사모했어요” 어쩌고 하는 상투적인 대사로 풀어낸다거나, 냇물을 건너지 못해 망설이는 여자 주인공을 남자 주인공이 업어서 건내 준다거나 하는, 그야말로 70년대 한국영화 같은 이야기(70년대 영화 맞긴 맞지만)에 그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대사도 아무래도 뻣뻣하기만 해서, 제대로 살아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남자 주인공2에게 애처롭게 말하는 여자 주인공)

그러고 보면 연기가 부족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일본인 앞잡이인 조춘이나, 무뚝뚝하지만 의로운 제2주인공 황정리는 무난했지만, 여자 주인공이라든가, 제1주인공 왕호는 좀 엉뚱한 점이 있었습니다. 왕호는 황정리에 비해 감정적인 인상이라는 점에서 어울리기는 했지만, 특유의 과장된 표정이나 이상하게 웃긴 느낌으로 이어지기 쉬운 눈빛 등이 이 영화 속 반항아 느낌에는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었습니다. 이런 데, 주인공이 방황하고 있다는 감정을 대충 만든 일본식 집 세트에서 술 주정하며 “여자 주인공이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구나” 같은 대사를 읊조리는 것 정도의 대강 만든 각본으로 몇 번 때우고 있는 것을 보면,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시정잡배 칼잡이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이 “농담 잘하는 귀여운 소녀” 느낌으로 잠깐 등장하는데, 너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우가 맡았던 것도 사실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칼잡이 날건달을 맨손으로 제압하는 황정리)

제목이 “흑룡강”이지만 정작 흑룡강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극중에서 한 번이라도 나오긴 나오는지 알수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중간에 “흑룡강”에 있는 상대와 싸워야 한다는 말이 잠깐 나오기는 하고, 마지막 결전을 강변에서 하기는 하기는 합니다만, 그 강이 흑룡강인지 어떤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크게 걸리지는 않지만, 묘하게 이상한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춘이 왕호를 소개하며 “놀라운 실력을 보십시오”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꼭 왕호가 화려한 무예를 보여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냥 왕호의 얼굴만 보여주고 무예 장면은 생략하고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 간다든가 하는 오묘한 연출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그 밖에...

1965년작 한국영화 “흑룡강”과는 다른 영화입니다.

사실상 왕호의 데뷔작으로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20세기 초, 무법지역이 배경이라서 무예를 익힌 자경단이 주민들과 엮여 무리 지어 살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자비하게 철도를 건설하자니 항의하는 주민쪽 자경단이 습격해 오고, 건설 회사 쪽에서는 자기 쪽 자경단을 동원해 싸운다는 내용입니다. 20세기초 만주 철도 건설 사업과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인 소재를 다룰 수도 있을 법한 배경입니다만, 그런 것은 안 나옵니다.

대신에 20세기 초의 그런 싸움을 다루는데도 이상하게 아무도 총을 쓰지 않고 무예와 권법만으로 대결하는 세계인 것으로 치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총은 안 쓴다고 해도, 칼이나 도끼 하다 못해 각목이나 몽둥이라도 들고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고 다들 어느 정도 폼이 나는 주먹과 발차기만 쓰는 지는 보다보면 굉장히 이상한데, 적당히 이 시절에 나온 만주물 영화의 관습으로 치고 넘어 가야 할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장면에서 몽둥이, 칼, 총을 쓰는 사람도 있다, 쓸 수도 있다는 내용이라든가, 왜 그런 것을 안 쓰게 되었는 지에 대한 내용을 조금이라도 넣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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