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예의 여인 (Dishonored Lady, 1947) 영화

1947년 UA 배급,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작 "불명예의 여인"은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뉴욕의 빌딩 숲, 어느 멋진 고층의 사무실에 헤디 라마르가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타납니다. 남자 직원들은 몰래 여자 주인공 험담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여자 주인공이 나타나자 어느 정도 굽실굽실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미술 편집에 있어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여자 주인공의 훌륭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첫 장면 다음의 이야기는 이 여자 주인공이 너무 자유롭게 살다 타락했다가 성실한 남자 주인공을 만나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까말까하는 흔한 이야기로 흘러 가 버립니다.


(포스터)

전체 틀을 보면 좀 재미 없는 영화입니다. 자유 분방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여자 주인공이 있는데 사실은 공허함에 시달리고 사실은 불행하고 그러다가 도덕적으로 타락도 하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다가 다시 성실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서 새로 출발해 보려고 하고. 이런 이야기는 널려 있고, 특히 70년대 이후 한국이나 일본 영화, 소설에서 좀 지나치게 신파극 형태로 많이 나왔기 때문에 지금 보면 너무 답답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결말에 가까워 오면, 초장에 그 자유 분방하고 강인했던 여자 주인공이 왜 그렇게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연약하고 부끄러움에 괴로워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고 슬프고 눈물 흘리고 그런 모습으로만 나오게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이 영화는 미국 영화에서 매끄러운 마무리가 쉽지 않다 싶으면 관습적으로 집어 넣는 수법대로 법정극으로 마지막을 꾸렸는데 법정에서 그러는 이야기로 가다 보니 더 뻔한 이야기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뉴욕 대형 언론사의 미술 편집 최고 전문가)

게다가 한술 더 뜨는 것은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스스로의 타락을 절감해 바닥을 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이상하다는 겁니다. 정황을 보면, 존 로더가 맡은 악역과 가깝게 지낸 후에 뭔가 "이건 너무 심하게 타락했다"면서 좌절하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당시 영화 심의 기준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보여 주지를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뭐 좀 여러 사람 만나고 살짝 방탕하게 살고, 술을 좀 많이 마시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정도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저렇게 괴로워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라는 느낌이 듭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그 정도 자유분방하게 사는 것은 오히려 자랑할만한 멋처럼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주인공이 결정적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남자. 왜 그런지는 봐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러니, 재미거리를 찾자면 결국 세세한 이야기 묘사에 군데군데 깃들어 있는 편입니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 살아 보자고 결심한 후 이사를 가고 일도 새로 시작합니다. 미술 편집이 아니라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데, 그 덕분에 새로 정착한 아파트의 근처에 사는 한 연구원 논문의 삽화를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 연구원과 서로 가까워진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일견 참신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이야기에서 성실하고 쾌활한 연구원 남자 주인공과 과거 거대한 언론사를 뒤흔들던 거물이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는 여자 주인공의 자신감이 서로 부딛히기도 하고 서로 이끌기도 하면서 관계가 깊어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에 재미난 대목이 제법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이 어긋난다든가, 그러면서 또 만나기 위해 애쓴다든가하는 기본적인 각본 구성이 괜찮은 순간도 몇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일부러 소음에 묻혀서 대사를 들리지 않게 하지만 영화 내용 흐름상, 두 사람의 표정상, 관객들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 짐작은 가게 해서 한번 더 관객 마음에 파고드는 기교 같은 것들도 좀 보였습니다.


(생물학 연구를 하는 가난한 남자. 그렇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의사 면허도 갖고 있는 의대 졸업생입니다.)

돌아 보면, 범죄도 일어 나고, 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추리도 하고, 그 사이에 위험한 여자 인물도 등장하는 것이 부분부분 이 시절 유행한 느와르 영화 분위기를 따라 갈 때도 꽤 있었습니다. 재미 있는 대목도 있지만 대체로 상투적인 면이 좀 많은 영화라고 했는데, 그래서 느와르 영화로서도 상투적인 면이 있어서, "저런게 많이 나오던 때가 있었지" 싶게 더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정신분석학 유행 시기의 영화라서, 주인공이 누워서 상담을 하는 와중에 뭔가 대단한 전환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로 굴러 간다든가, 추리로 해결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함정수사를 해서 범인을 드러나게 하는 꾀를 쓴다든가, 그런 것들이 기억납니다.


그 밖에...

이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을 타락시키는 사악한 늙은 남자 역할인 존 로더는 당시 여자주인공을 맡은 헤디 라마르의 실제 남편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한 해에 이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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