쟉크를 채워라 (1972) 영화

배우 박노식은 1970년대에 들어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아 연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출한 영화 중에 대체로 복수를 소재로 한 활극 액션이면서 제목이 명령문으로 된 영화가 세 편이 있습니다. 차례로 “인간사표를 써라”, “쟉크를 채워라”,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인데, “쟉크를 채워라”는 개중에 가장 혼란스럽고 허한 영화 아닌가 합니다. 내용은 홍콩으로 흘러든 박노식과 신성일의 역할이 “대륙공사”라는 정체불명의 집단과 대결하는 것입니다.


(포스터)

“인간사표를 써라”, “쟉크를 채워라”,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세 편 다 황당하고 괴이한 장면이 여럿 나오는 영화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인간사표를 써라”는 그래도 그냥저냥 대충 흘러가기는 흘러가는 편이고,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황당한 장면이 많아도 그 황당한 장면 속에서 이상한 것을 구경하는 맛이 풍성합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쟉크를 채워라”는 이상한 장면이 그냥 영화에 방해 되게 이상하기만 할 뿐이고, 그 때문에 앞 뒤 이야기가 잘 안 흘러가는 대목이 좀 더 많았습니다.

영화는 시작하면 한 사람이 악당들에게 살려달라며 도망치다가 붙잡혀 고문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비열한 악당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에, 멀리서 화살을 쏘면서 겁을 준다거나, 갑자기 어느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 말을 타고 따라다니며 채찍질해서 이 사람을 괴롭히는 등등 시작 장면은 괴상한 영화의 맛이 확실히 있습니다. 뭔가 조직의 배신자가 있고, 그 배신자를 사악한 조직의 악당들이 괴롭힌다는 내용도 선명히 전달 됩니다.

이 악당들 중에는 이상한 곱슬머리에 흰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괴이한 복장의 우두머리 비슷한 놈도 있는 듯 싶습니다. 그러니 괴상한 맛이 감도는 것이, 아마 이 영화도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만큼 해괴한 구경거리가 제법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은 기대도 하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알아 볼 수 있는 대목은 딱 그 시작 장면 뿐입니다. 이후의 장면은 도무지 이상하게 엮여 오락가락하다가 그저 억지로 대강 때우는 내용으로 버티게 됩니다.


(악당 대륙공사의 본부.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이 두목역의 허장강, 서 있는 사람이 속임수쟁이 역할의 독고성)

대충 구도를 살펴 보자면 이렇습니다. 북한에서 홍콩으로 온 신성일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대륙공사라는 조직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니까 시작 장면에서 악당들에게 당한 사람이 바로 신성일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대륙공사의 두목은 허장강인데 대륙공사는 조직폭력배 분위기의 악당 집단입니다. 사실 신성일의 아버지를 해친 것은 대륙공사 그들 자신이지만, 대륙공사는 신성일에게 우연정이 연기하는 월향이라는 사람이 원수니까 살해하라고 지시합니다.

한편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다가 홍콩에 들린 박노식은 한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고향 후배, 김희라를 찾아 가서 신세를 지며 홍콩 구경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 나이트클럽의 댄서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장에 가까운 인물은 최지희인데, 최지희가 보기에 박노식은 시골 사투리를 구성지게 사용하며 웃긴소리를 잘 하는 방정맞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최지희가 거느린 댄서 중에 바로 우연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독고성이 연기하는 보타이에 양복 차림으로 돌아 다니며 긴치 않은 농담을 끝도 없이 주절거리는 이상한 사기꾼 같은 악당이 한 명 있는데, 이 악당은 신성일, 박노식, 대륙공사 셋 사이에서 뭔가 속고 속이는 판에서 이상하게 이득을 갈취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박노식이 홍콩에서 싸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이상하게 애인처럼 엮이게 된 예라이샹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은 항상 술취한 것처럼 깔깔거리며 잘 웃는 사람으로 진도희가 연기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대륙공사가 악당이고, 복수를 하러 온 신성일과 놀러온 박노식이 있고, 그 밖에 박노식의 애인 비슷한 관계가 되는 진도희, 박노식이 신세를 지고 있는 김희라, 김희라의 직장 상사인 최지희, 최지희의 부하인 우연정, 여러 사람 사이에서 사기를 치려고 하는 독고성이 있는데, 신성일은 우연정을 죽이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관계인데 여기에서 무슨 음모와 복수, 숨겨진 비밀을 알려 주겠답시고 이야기는 계속 꼬입니다.

일단 박노식은 그냥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한국의 비밀요원이고 김희라는 비밀요원 부하인데 둘이 티격태격하는 고향 선후배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박노식이 좋아서 깔깔거리며 항상 같이 노는 줄 알았던 진도희는 사실 대륙공사의 직원으로 박노식을 감시하고 정체를 밝혀 보려고 접근한 인물이었습니다. 한편 우연정을 죽이기 위해 접근했던 신성일은 우연정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게다가 독고성은 비밀 장소에 사실 신성일의 아버지를 숨겨 놓고 있는데 신성일의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다 보면 뜬금 없이 신성일과 박노식은 사실은 원래 형제였다고 합니다.


(암살자 신성일)

이런 꼬인 관계와 비밀이 계속 터져 나오는 영화인데, 반전과 비밀이 드러나는 장면 장면이 모두 엉성하고 혼란스러우며, 연출은 싱겁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노식이 비밀을 알게 되는 장면은 난데 없이 독고성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박노식에게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맨날 “낄낄낄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재미있게 돌아가는 걸” 이런 대사만 하던 놈이 갑자기 뜬금 없이 팍 튀어 나오듯이 공손한 자세로 돌변하더니 왜인지 숨겨 놓은 비밀을 알려 주는 겁니다. 한편 죽은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살아 있었던 박노식 신성일의 아버지는 영화 중반을 지나면 슬그머니 잊혀지고 그냥 안 나옵니다. 꼭 어느 순간 나타나 박노식과 신성일, 아버지가 얼싸 안고 감동의 재회를 할 법도 합니다만, 영화를 끝까지 봐도 그냥 안 나오는 겁니다.

매사가 다 이런 식입니다. 보다 보면 도가 지나쳐서 실없이 웃긴 장면도 제법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연정과 신성일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우연정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육교만 보면 어지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예전에 서울에 살 때 자신의 옛사랑을 회고합니다. 내용이 뭐냐면, 옛날에 크리스마스 때 “나 잡아 봐라~”하면서 옛사랑과 둘이서 육교에서 장난치며 즐겁게 놀았는데 그때 눈에 미끄러져 자빠지는 바람에 옛사랑이 허무하게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후로 육교만 보면 어지럽고, 눈이 없는 홍콩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마침 신성일이 그 옛사랑과 똑같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뭡니까? 무슨 패러디 코미디에서 우스꽝스러운 옛 사랑으로 나오는 장면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진지하고 슬픈 장면입니다.

그런 식으로 연출이 비장하고 진지하고 장황하게 핵심처럼 나오지만 사실 허망하고 괴상할 뿐이며 앞뒤 이야기에 별 깊게 영향을 못 주는 장면이 꽤 많습니다.

우연정이 대륙공사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원래 신성일은 우연정을 죽이라는 임무를 받았지만 우연정을 사랑하게 되어 그것을 포기한 상황입니다. 대신 대륙공사에 우연정을 보내어 뭐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힘들겠지만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라고 신성일은 우연정에게 말 합니다. 이런 대사는 보통 신성일이 역으로 대륙공사를 속여 먹으려고 뭔가 술수를 쓰려고 속셈이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할 때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아무 대책도 없고 끝까지 봐도 무슨 다른 술수도 없습니다. 우연정은 대륙공사에 갔는데 별 할 말도 없으니, 그냥 “제발 좀...” 뭐 이런 말만 합니다. 그러자 대륙공사에서는 우연정을 고문합니다. 그리고 우연정은 고문 당하다가 그냥 죽습니다.

고문 장면이 쓸데 없이 장황한데, 괜히 좀 자극적인 연출을 하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고문 방식은 보일러실의 뜨거운 곳에 쇠사슬로 묶어 두어 괴롭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굉장히 해괴합니다. 뜨겁게 해서 괴롭힌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렇게 해서 무슨 정보를 어떻게 털어내려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쇠사슬을 푼 우연정은 도망쳐서 물 한 모금만 달라고 하는데, 그러자 어떤 어두운 곳에 악당 부하들 서너명 정도가 서서 낄낄 웃으면서 갑자기 아이스 버킷 챌린지처럼 자기들이 물을 뒤집어 씁니다. 이게 뭡니까? 그리고 악당들이 낄낄 웃는 장면을 길고 환상적으로 보여 줍니다. 뭔가 변태적으로 우연정을 괴롭히려고 한다는 분위기인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뭐가 뭔지 알아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잠시 후 우연정은 그냥 죽었다고 나옵니다.

장면이 허망한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으로는 대륙공사가 최지희와 김희라의 직장인 나이트클럽에 쳐들어 오자, 김희라 박노식이 이 악당들과 대판 싸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싸우는 장면 자체는 그럭저럭 무난합니다. 김희라가 주먹질하는 장면은 몇 초 정도지만 연출이 좋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싸우고 나서 패배한 악당들을 응징하는 장면이 너무나도 이상합니다.

박노식은 일장연설을 한 후, 어디선가 갑자기 관짝을 들고 나이트클럽 무대 쪽으로 나오더니 우연정을 죽인 죄값을 치르라고 합니다. 뭘 하려는 겁니까? 그 와중에 나이트클럽 손님 등등이 당황하자 갑자기 어디서 구했는 지 수류탄을 들고, 방해하면 터뜨려 버리겠다고 무섭게 협박합니다.

그리고 대륙공사의 부하인 진도희에게 그 관 속으로 들어 가라고 합니다. 이후, 악당 중에 괜히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던 그 흰 옷 입고 곱슬머리 이상하고 콧수염 기른 선글라스 쓴 악당에게 그 관을 끌고 대륙공사 본부까지 가라고 합니다. 참고로 그 흰 옷 입고 선글라스 쓴 악당은 끝까지 봐도 아무 사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악당이 당황하자 박노식의 부하인 김희라는 분노로 소리치면서 갑자기 총을 쏘며 “어서 관을 끌고 가라!”고 다그칩니다. 바깥에는 갑자기 괜히 비가 내리고 있는데, 그 비 속에서 진도희가 들어 있는 관을 끌고 선글라스 쓴 악당이 뭔가 처절하게 걸어서 악당 소굴까지 걸어 가는 장면이 한참 나옵니다. 사실 관 속으로 들어 가는 진도희인지 왜인지 빙그레 미소를 띄고 있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홍콩 거리에서는 콧수염, 선글라스, 흰 양복 차림의 이상한 사람이 관짝을 끌고 비를 맞으며 길거리를 계속 걸어 가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겁니까? 박노식과 김희라가 계속 따라 가면서 총을 쏘며 협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악당은 또 왜 성실하게 계속 관을 끌고 가는 겁니까? 애초에 도대체 관을 끌고 가는 이상한 퍼포먼스는 왜 하라고 한 겁니까? 영화를 봐도 아무것도 안 알려 줍니다. 하다 못해 관 끌고 온 것을 본 대륙공사 악당들이 “아니, 이런 짓을 하다니!”라면서 놀라는 장면이라도 보여 줄 법 한데 그조차 안 보여주고 대충 그냥 다음 장면으로 건너 뜁니다.

이야기를 엮어 나갈 방법이 마땅찮으니까 그냥 케케묵은 상투적인 수법을 앞뒤 없이 막 박아 넣은 장면이 괴상해진 사례도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박노식과 신성일이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만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신성일은 우연정이 죽은 후 울적해 하면서 길에서 담배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길가던 박노식과 완벽한 우연으로 그냥 마주칩니다. 박노식은 신성일과 한 두 마디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한국어를 쓰는 것을 알고 홍콩에서 한국인을 만났다니, 신기하구만 어쩌고 하다가 갑자기 둘이 술을 마시자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둘은 처음 보는 사이인데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괜히 길에서 의기투합해 술을 먹다가 친해진다, 뭐 이런 이야기를 펼쳐 놓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참 이상합니다. 공교로운 우연이 앞뒤 난데 없이 갑작스러운 것도 허망하지만, “자네는 붉은 술, 나는 흰 술, 섞어서 먹어 볼까, 섞는다고 다 맛있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고 하는 대화를 술취한 목소리로 나누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참 싱겁습니다.

두 사람은 그러다가 술에 아주 떡이 되어서 비틀거리며 걸어 가는데 “우리 발을 맞춰 걸어 가 보자”라고 하다가 발이 잘 안 맞으니까 갑자기 박노식이 “신발 좀 벗어 봐라” “양말도 벗어 봐라” 그러더니 두 사람의 양말로 두 사람의 다리를 하나씩 묶어서 2인 3각 모양으로 한 뒤에 “이러면 발이 잘 맞지”라면서 낄낄거리며 웃으며 밤길을 비틀거리며 걷는다는 이상한 감성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밤에 우연히 만나 술 먹고 난 직후, 대륙공사에서는 신성일에게 박노식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줍니다. 신성일은 하룻밤 술친구였을 뿐이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독백을 늘어 놓습니다. 한편 박노식은 마침 그날 술친구였던 신성일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서 기뻐합니다. 둘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신성일은 박노식이 형인 줄 모르고 대륙공사의 지령에 따라 박노식을 암살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암살할 것이었으면, 권총이나 칼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신성일은 괜히 박노식과 주먹으로 싸우려고 합니다. 한편 박노식 입장에서는 그냥 만나자마자 “너, 사실 내 동생이라더라”고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또 박노식은 이야기할 순간을 어정쩡하게 놓치고 신성일에게 두들겨 맞습니다. 형제끼리의 결투는 진흙탕 뻘밭에서 뒹굴며 싸우는 싸움으로 이어지는데, 진흙탕에서 싸우면서 싸움의 처절함을 강조하려고 하는 연출이 이즈음 한국영화에서 좀 너무 남용된 편이었기 때문에 별로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참 싸우다 말고, 마침내 이 무렵 박노식 영화의 버릇이라고 할 수 있는 아무 필요 없이 지나치게 거창한 비유법을 남용하는 긴긴 설교, 연설 장면이 드디어 극치를 이루며 등장합니다. 박노식이 나오는 1970년대 영화 중에 “광녀”에 나온 “어머니의 사랑이다” 운운하는 연설 장면은 너무나 어이 없는 통에 괴상하게 웃긴 것으로 정도가 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막판 연설 장면은 제가 보기에 “광녀”의 연설 장면을 초월합니다.

박노식은 신성일에게 반격을 가해 신성일을 후드려 팬 후, 신성일에게 반성하라면서 다음과 비슷하게 읊조립니다.

“똑똑히 들어! 네 몸에 흐르고 있는 피! 그 고깃덩어리는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 몸에 박혀 있는 사상! 그 붉은 사상만은 내 뿌리를 뽑아야겠단 말이다! 같은 동포니까! 한 사람의 씨를 받았으니까! 그 씨 하나는 남으로 흘러 왔고! 또 하나는 북에 뿌리를 박고! 남에 흘러온 씨는 토질이 좋아 대목이 되고! 북에 뿌리를 박은 씨는 병들고 시들어 가고만 있는 거야! 왜? 토질이 나쁜거야! 토질이 나쁘단 말이야! 질이 나쁜 땅덩어리는 하루 이틀에 좋아질 리 없지! 아니! 영원히 토질은 변치 않는 거야! 그 병들고 시들어 가는 씨를 하루 속히 뽑아서! 질 좋은 땅덩어리에 옮겨 심고! 물을 주고! 햇빛을 보게 해서 생생하게 되살려야 한단 말이다! ”

막판에 갑자기 반공영화 요소를 이상하게 강제로 끼워 넣으면서, 사실 우리는 형제라서 싸우면 안 되는데, 너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인간이 나쁜 놈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토질”이라는 단어를 매우 많이 쓰는 해괴한 비유법으로 이상하게 울부짖으며 터무니 없이 장렬한 어조로 길게 읊어 대는 장면을 볼작시면, 아, 이 영화는 뭔가 잘못된 토질에서 자라난 영화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생길만 합니다.

이후 신성일은 박노식이 형임을 알아 보고, 둘은 한 편이 되어 대륙공사와 맞서 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대륙공사 두령 허장강이 헬리콥터를 타고 일본 홋카이도로 갔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둘 다 헬리콥터를 타고 허장강을 좇아 갑니다. 이 막판 장면은 놀랍게도 진짜 헬리콥터를 동원해 촬영한 장면으로 되어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초라하게 도망치고 있는 허장강을 신성일과 박노식이 유쾌하게 껄껄 웃으면서 밧줄로 꽁꽁 묶고, 두 사람의 즐겁게 웃는 표정을 보여 주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겨울에 육교에서 술래잡기 하다가 눈에 미끄러져 애인이 죽었다는 슬픈 과거 회상 장면 - 진짜입니다.)

애초에 남과 북 출신의 형제가 서로 정체를 모른 채로 홍콩에서 다툰다는 이야기와 홍콩 유흥가의 댄서들 사이에 개입된 악당의 음모와 싸운다는 이야기, 정체를 숨기고 홍콩 유흥가에 잠입한 첩보원 이야기, 악당들 사이에서 속고 속이는 이야기 등등이 너무 복잡하게 연결된 구조인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박노식, 김희라, 신성일, 우연정, 최지희, 진도희, 독고성 등등 주인공급 인물만 해도 너무 흩어져 있었습니다.

노련한 사람이지만 웃기고 한심한 척 하며 위장하고 있는 박노식, 홍콩 유흥가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김희라, 과묵하고 울적해 보이는 암살자 신성일, 인기 댄서인 우연정, 듬직한 밤거리의 사장 최지희, 위험해 보이며 방탕한 느낌의 진도희, 끊임없이 속임수와 장난을 치는 독고성 등등 인물색이 다양한 것을 보면 이 많은 인물과 복잡한 줄거리 속에서 겹겹이 다채로운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도 잘하면 가능은 할 것 같습니다. 멋진 의상을 입고 큼지막하게 나와 있는 우연정의 모습을 보면, 홍콩 유흥가의 댄서가 복잡한 음모 사이에서 활약하는 신선한 활극이 떠오를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제작비와 이 영화의 제작환경을 감안하면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정말로 제대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도전이었을 겁니다. 단적으로 포스터와 달리 우연정은 굉장히 작은 역할 밖에 하지 않습니다. 가장 비중이 큰 장면이 고문 당하는 장면과 육교에서 나 잡아봐라 놀이하다가 눈에 미끄러져 죽은 옛 애인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게다가 영화를 보면, 그나마 영화를 찍다가 갈아 엎어서 중간에 영화를 다른 방향으로 급히 뜯어 고쳐 더 혼란스러워진 기색이 역력합니다. 증거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KMDB에 소개되어 있는 줄거리 정보를 보면, 영화 중간에 갑자기 사라지는 박노식 신성일의 아버지가 막판에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등, 실제 영화와 다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뭔가 사연이 있을 듯 나온 곱슬머리, 선글라스, 콧수염 악당도 사실 중간에 난데 없이 관 끌고 다니는 이야기에 나오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 영화를 찍을 때에는 뭔가 다른 이야기로 더 활약할 계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다듬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과연 제대로 풀지도 못했는데, 그나마 중간에 한 번 엎은 덕택으로 이상한 몰골만 남은 영화가 지금의 “쟉크를 채워라” 아닌가 싶습니다. 신성일이 우연정을 속이기 위해서 권총을 맞은 척 하고 아프니까 도와 달라고 속임수를 쓰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독고성은 신성일이 엄살을 부리고 있다면서, “10원짜리 머큐로크롬을 사서 발라도 9원어치는 남겠구만”이라고 하는 대사가 그나마 순수하게 재밌었던 한 마디로 기억에 남습니다.


그 밖에...

이 영화에도 1970, 80년대 영화에서 잡다한 악당 역할로 많이 나왔던 박동룡이 또 나옵니다. 대륙공사의 악당들 중 한 사람 역할입니다.

진도희의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관 속에 들어가서 끌려 갔던 진도희는 갑자기 박노식을 다시 찾아 오더니, “선생님을 보고 진정한 사나이를 알게 되었어요”라면서 갑자기 개과천선을 했다고 합니다. 박노식이 당황하자, 진도희는 “저를 또 때려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도 황당한데, 대륙공사에서는 배신한 진도희를 살해하기 위해 박동룡을 보냅니다. 박동룡은 밤길에서 낄낄거리며 진도희를 좇아가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박동룡은 좇아가다가 어처구니 없게도 오르막길에서 넘어져서 머리를 돌에 부딛히는 바람에 그냥 사망합니다. 이 모든 것이 웃기려는 연출이 아니라 감동적이거나 무서운 연출로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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