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 (1961) 영화

1960년대만 해도 서울 시내에는 마차가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부극의 역마차나 셜록 홈즈 시대 영국 런던 거리의 고상한 마차가 아니라 짐수레를 끌며 그날그날 건당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일꾼들이 말을 끌고 다니는 마차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택배나 퀵서비스, 내지는 화물 트럭 배달이 하는 일을 하는 마차가 서울 시내 이곳저곳 공사장이나 야적장 같은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마부”는 바로 그런 마차로 먹고 사는 주인공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 내용입니다.


(포스터)

지금 신문 기사 같은 것을 찾아 보면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특별상 기록에 빛나는 화려한 영화입니다만, 사실 내용의 중심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정형화된 신파극 이야기에서 크게 멀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 가는 집안이 있는데 복선에서 제시되었던 불길한 일들이 하나하나 다 일어나며 동시다발적으로 무너지는 통에, 영화 절정 부분 쯤 되면 온갖 불행이 한꺼번에 닥치는 오갈데 없이 망해 가는 집안이 됩니다. 그러다가 막판 즈음이 되면 주로 여자 주인공이 희생을 하거나, 아니면 갑자기 뭔가 놀랍도록 운이 잘 풀리거나 하는 일이 벌어져서 대체로 불행이 어지간히 극복되는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내용입니다. 돌아 보자면, 역대 한국영화들을 나눌 때, 그 기준으로 영화 시작할 때 고시 공부하고 있던 주인공이 결국 고시에 합격을 하면서 끝나는 영화와 결국 또 불합격을 하거나 고시를 때려 치우는 영화라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런 영화입니다만, 군데군데 괴력을 발휘하는 연출이 이상하게 빛이 날 때가 있었습니다.


(마부와 고시생인 그 아들)

일단 시작 장면이 자전거 도둑질 장면을 자동차 추격전 장면처럼 촬영해서 박력 있게 따라 갑니다. 그러다가 그 자전거 도둑이 도둑질에 실패하고 빈 손으로 집에 오면서 그 집안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이게 이 영화를 여는 장면입니다.

무척이나 도전적인 도입부였습니다. 달리는 자전거를 따라 가면서 가난하고 힘겨운 서울의 동네를 빠르게 훑어 내고 동시에 자전거를 훔치려고 드는 삶이라는, 그 바닥을 건드리는 느낌도 같이 치고 가는 역할도 하는 톡톡히 몫을 다했습니다. 영화 중반에서, 급격히 도시화, 산업화되고 있는 서울에서 그 한 켠에 산업현장의 빈틈을 노려 장사를 하는 마부, 마차꾼들이 일한다는 그 감상 자체도 지금 보면 운치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마부”는 밑천 없이 일하는 가난한 직업의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기도 해서, “마부의 딸이라고 얕보지 마세요”라든가 “마부의 아들이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같은 대사가 흔히 나올 정도 입니다.

멋진 자동차들이 달리는 도로 한켠에 드럼통이나 짐짝을 나르는 현장이 있고 그 사이를 말주인에게 말을 빌려서 일하는 가난한 마부들의 마차가 일하며 터벅터벅 걸어 가는 모습은 독특합니다. 이런 모습에는 이국적인 정취마저 흐릅니다.

감정 연출도 전체적으로는 고만고만하지만 괜히 군데군데 폭발적으로 와닿는 구석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말 주인 집의 식모인 수원댁과 주인공 마부는 서로 은근히 좋아하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냐면 마부가 물을 한 잔 달라고 하자, 수원댁은 한 바가지 물을 주는데 마셔 보니 물이 아니라 술입니다. 마부는 “이건 술인데”라고 말을 하고 수원댁을 살짝 쳐다 보는데 수원댁은 살짝 웃으며 눈을 피합니다. 고단하고 목 마른데 그것을 마시는 연기하며, 수원댁의 표정하며, 불과 4, 5초 정도 밖에 안 되는 장면인데 이 장면을 연기하는 김승호와 황정순 배우의 모습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냥 물 달라고 했는데 술 줘서 그거 마시는 장면이고 별 대사도 없는데, 이 정도로 달콤한 장면을 도대체 언제 또 보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간만에 영화 보러 온 것이 어색한 수원댁과 마부. 두 사람이 보는 영화 속에서 보는 영화는 김지미가 출연한 "춘향전"인데 이 영화가 개봉하던 해, 연초에 실제로 개봉했던 영화입니다. 같은 해에 나온 "역부의 딸"이라는 영화에서는 그 김지미가 영화를 보던 김승호의 딸 역할로 같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멋진 장면들이 영화의 절정 장면 같은 곳이 아니라 그냥 대충 슬쩍 여기저기 흩어진 장면이라는 것은 무척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엄앵란이 길가에서 엄앵란 옛 애인에게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황해가 나타나 두들겨 패주는 장면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연출이 흑백 영화 특유의 옛 느와르 영화 운치로 꾸며져 있어서 대단히 돋보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체 줄거리에서는 그냥 고만고만한 장면에 그치는 정도입니다. 다른 예로, 이 영화에서 김승호의 첫째 딸이자 엄앵란의 언니로 나오는 조미령은 썩은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대사 한 마디 없는 배역이지만 연기의 위력은 환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너무나 뛰어 났습니다. 그런데 조미령은 그냥 이 집안에는 불행한 일이 많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소모성으로 활용될 뿐이고, 그나마 중반 이후가 되면 나오지도 않아서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다행히 평범한 신파극이라고 하는 그 중심 줄거리가 배우들의 호연과 안정적인 촬영으로 잘 담겨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고시 공부하는 첫째 아들 역할의 신영균은 좀 재미 없는 옛날 영화 남자 주인공 모습일 뿐인데 괜히 중간에 버릇 가르친다고 동생 패기나 하는 등, 멋 없어 보일만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 속 인물을 보여 주기에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조미령, 황정순, 김승호의 연기는 가난한 고단함 속에서 나름대로의 희로애락과 꿋꿋함, 의지 등이 자연스럽게 엇갈리는 모습을 대단히 멋지게 잘 보여 주었습니다. 엄앵란에게 바람 넣는 친구 역할의 최지희라든가, 악당 역할인 말 주인 집 부부 등도 악역 연기를 대단히 깨끗하게 잘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뭐든 수상을 한 아주 초창기의 한국 영화로 흔히 언급되는 영화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막상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할 때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객석이 많이 비는 편이었고 반응도 그렇게 열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 특별상(Silver Bear Extraordinary Jury Prize)은 두 개가 수여 되었는데, 이 영화 "마부"와 함께 상을 받은 영화가 바로 장 뤽 고다르가 감독을 맡았던 "여자는 여자다(Une Femme Est Une Femme)"였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사람은 강대진 감독인데 이 영화를 작업할 때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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