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라그나로크 (Thor: Ragnarok, 2017)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는 판타지 모험물의 도리를 충실하게 잘 따라가는 줄거리를 이용한 영화였습니다. 가끔 저런 것은 판타지고, 이런 것은 SF라면서 괜히 엄격하게 구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사실 예로부터 SF와 판타지는 흐릿하게 섞일 때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신비로운 문화를 가진 외계 행성을 신화의 왕국 같은 배경으로 삼고, 마법과 괴물 대신에 외계인의 초능력과 외계 동물이 나오는 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것들은 SF물에서 흔했습니다. “플래시 고든”은 대표적인 예일 것이고, “존 카터” 시리즈는 고전일 겁니다. 따지고 보면 “스타워즈”도 비슷하게 엮일만 하겠습니다.


(포스터)

그래서, 특이한 능력이나 배경이 있는 주인공이 있는데 위기를 겪으며 고생을 하게 되고, 그러다 주인공이 세계를 구하기 위한 대모험을 하게 됩니다. 고생을 하느라 이상한 동네에 빠졌다가 주인공은 새로운 동료를 얻고 동료들과 함께 한층 멋진 모습으로 귀환해서 악당 두목을 결국 물리칩니다. 익숙한 뼈대 대로입니다.

복선으로 나왔던 소재나 예로부터 전해내려온 전설 같은 소재를 막판에 다시 챙겨 써먹으면서 결말을 꾸미는 모습도 정통파 그대로였습니다. 이 영화는 애초에 북유럽 신화와 닿아 있는 초능력 영웅인 토르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큼, 이렇게 판타지 모험물 이야기의 정통에 잘 갖다 붙이기에 더 유리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상한 돋보이는 옷을 굳이 차려 입고 악과 싸운다고 하는 초능력 영웅이 나오는 이야기라면 어쩔 수 없이 유치한 느낌을 인정하고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괜히 심각하고 진지한 느낌에만 전적으로 빠지는 것은 좀 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랬으면서 성공한 예는 드물어서 “다크 나이트”를 비롯해 고작 몇 편 뿐인 것 같은데, 그런 드문 예를 너무 따라가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다크 나이트”는 악당 조커의 맛이 간 모습 비중이 주인공 못지 않게 컸던 예외라고 생각합다.

그런 면에서 왕국을 다 집어 삼키려는 죽음의 신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흥과 코미디를 많이 살려 가는 이 영화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종종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지나치게 겁이 없으며 쾌활하고 단순한 성격을 잘 살리는 주인공 토르를 활용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거기에 어울리는 코미디를 살려 가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중반부에 토르가 노예로 붙잡혀 고생하는 대목에서는 좀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코미디를 많이 하는가 싶기는 했습니다만, 과한 이야기가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특성들을 살려 가며 코미디와 동시에 이야기가 발전해 나가는 것을 굽이굽이를 살려 빚어 나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티격태격 코미디하는 일행들)

1970년대, 1980년대의 알록달록한 색감과 전자 음악으로 장식한 외계 행성 모습은 흥에 겨웠고, 영화의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레드 제펠린 음악도 흥겹게 듣기 좋았습니다. 제프 골드블룸은 원래 이런저런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지만, 해괴한 코미디를 줄기차게 읊어 대는 이상한 외계인 악당 역할을 재미있게 보여 준 것도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케이트 블란쳇도 활약하는 분량은 약간 적었지만 겉모습은 너무나 근사하게 그럴싸했습니다.

결말의 전환 역시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라그나로크라는 소재를 반전이라면 반전 비슷하게 다루는데, “이런 놀라운 반전이 있었지롱”이라면서 그 자체를 엄청난 비밀처럼 써 먹고 놀래키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죽음의 신으로부터 세계를 구한다는 다른 중요한 중심 줄거리를 펼쳐 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반전을 곁가지로 써먹습니다. 그래서 반전이 줄거리를 뒤집지 않고 줄거리를 더 풍성하게 꾸며냈습니다. 쓸데 없이 소재 하나, 반전 하나에 집착하지도 않고 거기에 휘둘리지도 않으면서 이야기를 더 재미나게 잘 부풀리는 맛이 있었다고 합니다. 복선을 잘 살려서 멋지게 눈 앞에 보여 준다는 면에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화려한 화면으로 압도하는 맛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날개달린 말을 타고 우주에서 날아 가는 발키리의 모습이라든가,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헐크와 토르의 싸움 장면, 레드 제펠린 음악에 맞춘 전투 장면 등등, 보기에 멋진 장면 역시 없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 밖에...

토르 시리즈 중에서 제일 재밌게 봤지만 결말에서 아스가르드의 다음 왕위가 그래서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좀 아쉬웠다고 생각합니다. 캡틴 아메리카와 그렇게 어울려 다녔으면 민주주의나 공화제 같은 것을 좀 배울 수도 있지 않았을지? 덕택에 오히려 나중에 이어진 다른 영화의 결말이 더 괜찮아 보이게 되기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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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세뇨르 2019/05/17 13:17 # 삭제 답글

    코스츔 입은 초능력 영웅으로 심각한 이야기 하는데 위화감이 심하시다면 곽재식님 취향에는 캡틴 아메리카는 안 맞으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래도 퍼스트 어벤저와 윈터솔저 두 작품은 썩 양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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