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반호 (Ivanhoe, 1952) 영화

“아이반호”는 영국 기사 모험담 소설의 대표작이지만 의외로 최근까지 완전한 한국어 번역판을 접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1952년작 할리우드 영화 “아이반호”가 아이반호 이야기를 접하는 주요 통로 중에 하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에서 아이반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결한 목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 내고 거기에 뛰어드는 용기와 그걸 해내는 재주를 보여 주는 영웅으로 나옵니다. 그 아이반호의 목표는 간신배가 차지하고 있는 영국에서 간신배 일당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니면서 진정한 왕인 리처드1세를 다시 세우는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포스터)

저는 어린이판 “아이반호”를 읽고 나중에 “이거 영국 무협지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모험을 떠나는 싸움을 잘하는 주인공, 여러 악당들이 우루루 몰려들면 놀라운 솜씨로 혼자 몰아 내는 모습, 명예를 중시하는 대사를 읊어 대면서 당당하게 겨루려고 하는 대결, 남자 주인공에게 항상 사랑으로 엮여 드는 여자 등장인물 등등. 그런만큼 쉽게 쉽게 이어지는 옛날 이야기 모험담 틀을 따라 가는 내용입니다.

물론 정형화된 무협지와 다른 면도 선명하긴 합니다. 보통 무협지에서는 약했던 주인공이 이러저러한 놀라운 물건이나 뛰어난 스승을 만나 더 싸움을 잘하게 되는 구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반호 이야기의 주인공 아이반호는 처음부터 싸움의 대단한 고수로 나옵니다. 적지 않은 무협지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중시하지 않는 것에 비해 아이반호는 리처드1세 왕과 십자군 전쟁의 시대라는 배경과 역사 사건이 중요한 소재라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물론 무협지들 중에도 이런 주인공, 이런 배경을 다루는 것들도 결코 없지는 않으니, 아이반호 이야기가 아주 독특한 것만은 아니겠습니다만.


(기사와 귀부인?)

그러니만큼, 이 영화의 재미는 옛날 기사 무용담에서 기대할만한 이야기 거리들을 지루할 틈 없이 잘 부려 놓는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괜히 길게 감정을 잡거나 주인공의 고뇌를 보여 준다면서 재미 없는 대사 길게 읊게 하면서 시간 끄는 것 없이, 순서대로 차곡차곡 다채로운 기사 무용담 소재를 보여 줍니다.

이 영화에는 그런 소재들 중에서도 막연하고 전설적인 무용담 대신, 보다 역사적인 배경에 기대어 있는 구체적인 소재들이 나옵니다. 중세 기사들의 몸값 풍습, 까막눈인 기사, 기사들의 결투, 운율에 맞춘 말을 계속 주절거리는 광대로 일하는 노예, 지나가는 나그네라면 성에 머물고 가는 풍습 등등에서부터, 영국의 색슨족과 노르만족의 갈등, 십자군 전쟁을 위해 왕과 기사들이 머나먼 이국까지 떠나 있는 상황, 유대인 상인 공동체 이야기, 성을 빼앗기 위해 벌이는 전투 등등 굵직굵직한 이야기 거리들도 다룹니다. 나중에는 마녀 사냥과 중세의 재판 문화도 소재로 다룹니다.


(기사의 대결)

배우들도 이런 소재를 다루는 내용에 잘 어울립니다. 로버트 테일러는 정통파 사극 영웅 주인공을 잘 해내고 있고, 비열한 존 왕을 연기하는 가이 롤프도 정통파 악역 연기가 깔끔합니다. 수동적인 역할에만 머물러 있는 답답한 인물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금발의 공주를 연기하는 조운 폰테인과 흑발의 유대인 부자 딸을 연기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런 옛 이야기 속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의 쌍벽을 이루는 무게로 우뚝하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조운 폰테인)

진짜 같고 실감 나는 중세 풍경 보다는 어느 정도 옛 이야기의 관습 속에서 꾸며진 느낌이 있는 영화이고, 괜히 유대인 문제나 유대인의 신앙 문제는 제법 다뤄지고 있는데 비해, 아이반호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리기 위해 원작에 비해 로빈 후드는 가려져 있고 리처드1세의 비중은 확 줄어들었으며 흑기사는 나오지도 않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체가 한 덩어리로 꽉 잡혀서 감동을 주는 영화라기 보다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충성, 명예 같은 것으로 엮여 있는 사연 속에서 옛 역사 이야기의 재미난 흥취를 적당히 즐기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흘러간 영웅이 정체를 숨기고 몰래 잠입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듣는 장면이나, 굉장한 배짱으로 터무니 없는 내기나 대결에 응하는 주인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악당들이 득실거리는 소굴로 혼자서 긴장 속에 걸어들어가는 영웅,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 속에서 의미와 암호를 주고 받는 이야기 등등은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압도적이라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결투 장면이나 전투 장면도 성의는 충분히 보이는 영화입니다. 불타는 성에서 혼란한 싸움 와중에 갑자기 바닥이 불타 무너져 내리면서 칼싸움 상황이 급변하는 장면처럼 영화 속 시각 연출로 보여 주면서 관객을 감탄하게 하는 대목도 몇 군데 있었습니다.


그 밖에...

이 영화에 이어서 1953년작 “원탁의 기사들”, 1955년작 “쿠엔틴 더르워드”의 영화가 꼭같이 리처드 소어프 감독, 팬드로 버먼 제작, 로버트 테일러 주연으로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영국 기사 이야기 3부작인 셈입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원탁의 기사들 (Knights of the Round Table, 1953) 2019-07-09 22:12:07 #

    ... 아내는 기사 같은 장면들이 잘 엮여 있어서 볼거리가 되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 이 영화는 리처드 소어프 감독, 팬드로 버먼 제작, 로버트 테일러 주연인데, 1952년작 “아이반호”, 1955년작 “쿠엔딘 더르워드의 모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영국 기사 이야기 3부작인 셈인데, 그렇게 세 영화를 묶어 보면 이 영화가 그 중 두 번째에 속하는 셈 ... more

덧글

  • 서산돼지 2019/07/10 09:38 # 답글

    컬러영화였군요. 저는 TV주말의 명화시간에 흑백으로 보았습니다. 20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빛나는 미모에 눈이 멀어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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