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 친히 듣는 것이 적으면 여러 마음 헤아리기가 두렵다 - 고려시대 명언 고려시대의 명언과 유행어

963년의 일입니다.

의심 나는 사람이면 가차 없이 감옥에 가두던 이 시기의 광종은 무슨 생각인지 궁전 바깥에 나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왕육이라는 자신의 친척인 신하 집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래 살던 궁전은 수리하고 고쳐 짓도록 했습니다. 광종은 그렇게 거의 2년 정도를 궁전 바깥에서 지냈습니다. 아마 제법 궁전 수리를 크게 했나 봅니다. 이런 일이 고려시대 역사에서 흔하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광종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잘은 모르겠습니다. 일단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궁전을 좀 더 거대하고 화려하고 위엄있게 고쳐지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중에 최승로가 "시무28조"와 함께 올린 글에 보면, 광종이 잘못한 일을 언급하면서 궁전을 너무 과하게 건설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963년 무렵에 궁전을 수리할 때 궁전을 더 크고 멋지게 지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그 글에서는 광종이 1년에 쓰는 재물이 태조 왕건이 10년 쓰는 재물 만큼 많았다고 비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재물을 많이 쓸 수 있을만큼 광종은 재물을 탄탄히 많이 모아 놓았던 것 같다는 추측도 해 볼 수 있습니다. 광종이 재물을 많이 썼다는 평은 있는데 비해서, 재물이 부족하거나 세금을 많이 걷어서 불평이었다는 기록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원래 재물을 모으는데 밝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감옥에 가둔 사람들로부터 적당한 수준으로 재물을 뜯어내는 일을 잘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안검노비의 효과가 좋았을까요? 광종 시대에 중국 주나라(후주)에 구리를 많이 팔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혹시 국제 정세를 잘 읽어서 무역으로 재물을 벌어 들였던 것일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광종은 궁전 공사를 지시하면서도 자신이 무너뜨리려고 하는 적들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배신한 신하들이 공격해 온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벽이나 관문을 궁전에 더 세우거나, 궁전을 지키는 병사들을 더 많이 둘 수 있도록 궁전 구조를 바꾸라고 지시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암살자들이 들어 올 수 있는 길을 막기 위한 장치를 하거나, 반대로 탈출할 수 있는 비밀통로 같은 것을 이때 만들어 두었다고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듯 싶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신하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더 멋지고 거대한 건물을 지으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광종 때와는 시대의 차이가 있는 기록입니다만, 고려 궁전의 정문인 승평문과 그 안에 있는 문인 신봉문을 두고 중국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서긍은 "모양이 더욱 굉장하고 웅대하다"고 감탄한 기록이 있습니다. 서긍은 자신이 남긴 "고려도경"이라는 기록에서 건물이 높고 여러 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동화주(銅火珠)"라고 하여 번쩍거리는 장식품도 문의 네 모서리마다 붙어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건물에 글씨가 붙어 있는 곳에는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칠한 모영이었고 글자체도 구양순 체 비슷한 것이 매우 멋졌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송나라의 임금들은 대체로 고려의 국력을 강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저는 느낍니다. 어쩌면 그것은 광종 시대 이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들이 화려한 고려 궁전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영향인지도 모를 일 입니다.

현대에 고려 궁전의 유적을 보면 산비탈이나 언덕에 지은 형태가 흔한데, 비탈에 지은 것을 잘 이용하면 아래쪽에서 보았을 때 위쪽 건물은 더 높아 보이고 건물이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저런 방법을 이용해서 광종은 거대한 궁전을 건설하고 "나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곳에서 사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어서 신하들이 겁을 내고 우러러 보도록 위엄을 세우려고 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광종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가지 제도도 바꾸었습니다. 960년에는 신하들의 옷 입는 색깔을 정해 준 일도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 신하들은 자기가 알아서 적당한 예복을 입고 궁전에 들어 오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벼슬이 얼마나 높은 지에 따라 임금이 정해준 색깔의 옷만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높아 보이는 지, 낮아 보이는 지 하는 문제를 임금이 결정하는 세상이 된 셈입니다.

또한 같은 해에 수도인 개경, 즉 지금의 개성을 "황도(皇都)"라고 부르고, 제2의 수도인 서경, 즉 지금의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바꿔 부르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보통 황제를 나타낼 때 많이 쓰는 "황(皇)"이라는 글자는 "왕(王)"이라는 글자 보다 더 격이 높게 볼 때가 많으니, 광종은 자신의 궁전이 있는 도시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하려던 수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곁다리 이야기입니다만, 세월이 흘러 나중에 인종 무렵에 인종이 "앞으로는 문서에 임금을 높여 부른답시고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고 쓰지는 말라, 너무 과한 것 같다"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러니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인종시대 이전에는 고려 궁전에서는 임금을 높여서 "신성제왕"이라고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고려 임금을 "신성제왕"이라고 불렀을지요? 저는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는데 골몰했던 광종이라면 "신성제왕" 같은 칭호를 개발해서 쓰라고 지시 했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한번 해 봅니다.

공사가 끝난 후, 광종은 궁전으로 돌아 오면서 신하들에게 그 동안 궁전 바깥에서 떨어져서 사는 동안 신하들과 임금 사이에 이야기가 충분히 잘 오가지 못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면서 글을 내려 설명하기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친히 듣지 않는 것이 많으면 여러 마음 헤아리기가 두렵고 걱정스럽다. (多不親聽 慮恐衆心 다불친청 여공중심)"

만나서 직접 의사소통하는 것이 적으면 막연히 여러 사람의 뜻을 짐작하기만 하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의견을 전달하고 생각을 나눌 때에는 역시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가까이서 있어야 일이 잘 진행되고 오해가 없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 같습니다. 나라 일을 위해 신하와 임금이 직접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가까이 있어야 일이 잘 되지, 거리가 멀면 다른 방법으로 서로 대화하려고 노력해도 일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내가 여러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서로 말이 잘 안 통해서 오해하고 의심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이제부터는 좀 툭 터놓고 하고 싶은 말 뭐든 격 없이 이야기해 봐라, 이제 나도 함부로 사람 의심해서 감옥에 가두고 그런 일 안 할게" 이런 느낌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는지요?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광종의 함정이었다고 봐도 될 겁니다. 광종의 의심과 가차 없는 투옥은 이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언제까지나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33편 정도만 소개해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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