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 학문을 많이 쌓지 않으면 선을 알 수 없다 - 고려시대 명언 고려시대의 명언과 유행어

992년의 일입니다.

성종 시대의 고려 조정 사람들은 나라를 평온하게 유지하면서 사람들을 더 잘살게 해 보자는 꿈을 꾸고 있었던 듯 합니다. 전투 속에서 적과 싸워 이기며 인생을 보낸 왕건이나 음모와 술수를 이용해서 목표를 이루려는 광종과는 뭔가를 이루어 보려는 방향이 다른 셈입니다. 이 시기 고려 조정은 학문을 연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데 과거보다 더 공을 들이는 느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시대였던만큼, 이 시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충성과 효도에 대해서 잘 가르치고, 충성과 효도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더 잘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정책이었습니다.

특히 성종은 효도에 대해 애틋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성스러운 아들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성종은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효도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성종은 어렸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어른이 될 무렵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효도 다운 효도를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을 널리 가르치겠다고 이런저란 자료를 구해다가 읽어 보니, 펼쳐드는 책마다 온통 나와 있는 말이 부모에게 효도해라, 효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과연 효도란 어떤 느낌일까"라는 식으로 약간 동경하는 마음까지 생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계기가 찾아 오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983년, 궁전의 어른이었던 80대의 신정태후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신정태후는 성종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없이 자란 성종을 가까이에서 길러 준 사람이 바로 신정태후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성종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진심으로 깊이 슬펐다고 합니다.

신정태후는 혜종을 암살하는 자객이 돌아 다닐 때에도, 광종이 사람들을 마구 감옥에 가둘 때에도 항상 궁전 한켠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온갖 일이 벌어지던 궁전에서 할머니 신정태후만은 항상 같은 곳에서 성종을 돌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굉장히 허전하기도 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신정태후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성종의 모습에 감동할 정도였습니다.

이 즈음 해서, 성종은 뭔가 효도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된 듯 보입니다. 몇 년이 지난 989년에는 자기 자신의 부모 제사 날에는 며칠 동안 불경을 읽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짐승 도살도 금지하면서 경건히 지내겠다면서 규칙을 만들기도 합니다. 제사날이 되면 항상 절에 직접 가서 향을 피우기도 했답니다.

990년에는 전국에 효도로 이름 난 사람을 조사해서 상을 내려 주는 정책을 실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중세 시대의 이야기인지라 효도로 이름 난 사람들의 사례가 지금 보면 조금 황당한데 한 번 소개해 보면 이렇습니다.

- 서도, 즉 지금의 평양의 박광렴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형상이 꼭 같은 말라 죽은 나무를 하나 찾게 되어 그 나무에 어머니와 같은 예의를 다했다고 합니다.
- 남해, 즉 지금의 경남 남해의 함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침실에 빈소를 만들고 다섯 달 동안이나 평상시와 다름 없이 밥을 해서 주었다고 합니다.
- 구례, 즉 지금의 전남 구례의 손순흥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 그림을 그려서 받들어 모시고 살면서 3일마다 한 번씩 무덤에 찾아 가 살아 있을 때 같은 흉내를 냈다고 했습니다.
- 수도의 조영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자기 집 동산에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아침 저녁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의 오륜행실도에 나온 고려 효자 최루백.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공공누리1:
고려시대 효자 중 또다른 유명한 사람으로는 최루백이 있습니다. 최루백은 수원 사람인데,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당했다는 말을 듣자 도끼를 들고 바로 산으로 들어 가서 호랑이를 추적해서 찾아 내어 처치한 후, 그 뱃속에서 아버지 유해를 찾아 내어 장례식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인기 있는 이야기여서 이렇게 조선후기의 "오륜행실도"에도 실렸습니다. 최루백을 보통 염경애의 남편과 동일 인물로 보는데, 염경애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효도에 관심이 많았던 성종은 990년대 당시의 관점에서 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훌륭하고 상을 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곡식 백 석 그러니까 대략 15톤 정도, 은으로 만든 밥 그릇 두 개, 비단 및 보통 옷감 68필을 각자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요즘 왠만한 표창장을 주면서 주는 상 보다도 더 높은 금액의 상을 준 것입니다. 게다가 "문려"라고 하여, 이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워 둔 작은 건물도 각자의 동네에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성종이 오직 자신의 효도에 대한 관심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보다도 학식이 더 풍부할 인재를 찾기 위한 사업도 그가 임금이던 시기에 진행되었습니다.

992년에는 학문이 뛰어나거나 무예가 뛰어난 인재라면 직접 궁전에 찾아 와서 스스로 실력을 보여 달라는 명령이 성종의 이름으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교육하고 인재를 길러낼 방법을 찾았지만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조정에서 궁금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학문을 쌓는 것이 중요한 지 언급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학문을 많이 쌓지 않으면 선하다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다"

나라의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대충 "이게 착한 일 같은데" 같은 느낌만으로 일을 해서는 정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있는 예산으로 홍수 난 지역에 둑을 쌓는데 써야 하는 지, 아니면 전염병 난 지역에 의사를 보내는 데 써야 하는 지 유리할 지, 그런 부류의 문제를 두고 어느 쪽이 더 옳은 행동인지 그냥 느낌으로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땅을 얼마나 가진 사람에게 세금을 올리는 게 좋을 지, 낮추는 게 좋을 지, 하는 문제도 아는 게 없고 궁리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좋은 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대충 "이 정도 땅 넓이를 가진 사람에게 세금 낮춰주면 다들 고마워 하겠지"라는 식으로 일을 해서는 정말로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라고 말했다는데, 고려 성종 떄의 "학문을 많이 쌓지 않으면 선을 알 수 없다"라는 말은 비슷한 뜻을 긍정적인 말투로 한 이야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아무 배경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학문을 많이 쌓지 않으면 선을 알 수 없다"는 말이 나온 배경을 따져 보자면 아마도 당시에 학문에 뛰어난 최승로 등의 인물이 주도하던 조정에서 그들 스스로 자기들처럼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을 더 우대하기 위해서 강조했던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임금의 명령은 글 잘 짓는 신하들이 말을 꾸며 써 주곤 하니 이 말 자체를 이몽유 같은 글 잘 쓰고 학식 깊은 당시의 신하들이 나서서 써 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비슷한 분위기에서 995년에는 "선비가 벼슬을 얻은 후에 일을 한다는데 이유로 학식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벼슬 살이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책을 읽고 글짓는 것을 연습해서 밤낮 힘들게 공부하여 과거시험을 치릅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지식을 쌓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그때부터 이제 공부할 이유는 더 이상 없어졌고 더는 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날 겁니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아부를 잘 하고 줄을 잘 서야 성공하는 것이지, 이미 과거 시험도 합격한 마당에 다시 공부를 왜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을 잘 하려면 계속 해서 더 무엇인가를 깊이 알아 나가야 하고 익혀야 합니다. 즉 "선비가 벼슬을 얻은 후에 일을 한다는 이유로 학식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한번 합격했다고 해서 학문의 세계와 완전히 담을 쌓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말입니다.

성종 시기에는 그래서 벼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기적으로 과거 시험치듯이 글을 지어서 제출하라고 하는 정책이 나왔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방법이 얼마나 좋은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높은 벼슬아치들로서는 한동안 굉장히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33편 정도만 소개해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덧글

  • 파파라치 2019/09/18 08:17 # 답글

    그런데 저 당시의 학문(구체적으로는 유학)이 언급하신 것과 같은 재정학, 행정학, 경제학에 해당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학문이든 사고력을 쌓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거든요.
  • 게렉터 2019/09/18 08:48 #

    어느 정도 공감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때는 과거 시험이 시행된지 100년도 안됐을 시기니 그냥 한문으로된 책 잘읽고 무엇인가를 글로 쓰고 정리하는 데만 능력이 있어도 괜찮은 인재이던 시기이니 그런 식으로 엮어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나싶습니다
  • 파파라치 2019/09/18 09:37 #

    네 보통 교육이 보편화된 현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문맹이 일반적이었던 저 시대에 기본적인 교양을 갖춘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학 공부에는 경전 뿐 아니라 역사도 포함되니, 이전에 비슷한 문제를 겪은 사례들도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되었겠지요. 다만 어느 정도의 교양을 쌓았다는 전제 하에(과거에 합격할 정도라면 기본적인 교양은 갖췄다고 봐야겠지요) 실제 관료 혹은 정치가로서 실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더 깊은 유학 공부보다는 실제로 해당 업무를 해나가면서 터득하게 되는 부분이 더 컸을거라고 생각합니다.
  • Fedaykin 2019/09/18 20:32 # 답글

    왕은 최고의 유학자여야 한다는게 꼭 조선시대에만 국한되는것도 아니었군요
  • 게렉터 2019/09/18 23:41 #

    광종 시기 과거 제도 출신 인재들을 중시해서 과감하게 뽑기 시작했던 데다가, 뒤이어 성종 시기에는 사대부를 우대했던 중국 송나라 문화를 선진국 문화라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 이 두 가지가 서로 연이어서 함께 영향을 미치는 바람에 성종 시기에 유학자스러운 문화가 갑자기 확 커나가는 느낌이 있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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