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여왕폐하 대작전 영화



어느 평론가는 제임스 본드 영화의 진부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하는 일이라고는 여기 저기 관광지를 다니면서 자기 이름을 두 번 말하고, 여러 여자와 자다가 마지막에 적에게 잡히고 탈출하는 것이 다입니다."라고 했다. 완벽한 요약이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싫어하건 좋아하건 모두 이 점에 동의한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걸 좋아하는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여섯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인 여왕폐하대작전이다.




여왕폐하대작전은 아주 독특한 제임스 본드 영화다. 어중간한 시대 때문인지, 이 영화의 '화면빨'은 메이져 헐리우드 스펙타클 영화의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70년대 한국 영화같은 제3세계 영화나 유럽 영화의 느낌이 물씬 난다.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중 거의 유일하게 '미국'의 등장도 언급도 없는 에피소드이며, 온갖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다른 시리즈들과 달리 무대는 대체로 스위스 아우스부르크로 고정되어있다.

사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 영화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인의 실루엣으로 시작하는 오프닝 주제곡 장면부터 파격이 심하다. 실루엣이 나오기는 한다만, 다른 시리즈 처럼 여인들이 춤추는 것은 아니며, 대신 지금까지 나온 다섯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장면장면을 보여준다. 다른 편의 에피소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이 제임스 본드의 불문율인 것을 보면, 이것은 상당한 파격이다.




결정적인 파격은 영화의 핵심인, 캐릭터, 배우, 줄거리에 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본드걸은 그 어떤 제임스 본드영화와도 달리,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감성을 가진 캐릭터다.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볼거리가 아닌 캐릭터로서 여배우를 발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영화에는 분명 본드걸이 '여자주인공'이다. 어느 정도 캐릭터가 있는 본드걸은 30년이 넘게 지난 1999년의 시리즈 19편 The World Is Not Enough의 소피마르소 정도 뿐인데, 그나마 여왕폐하대작전의 트레이시에 비할바는 아니다.(The World is Not Enough와 여왕폐하대작전은 또다른 재미있는 연관 관계도 있다.)

여유있는 본드의 모습 뿐만아니라 스파이로서의 회의감과 애환까지 표현하려 하는 시도는 골든아이에서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골든아이의 표현이 억지스러웠던것과 달리 이 영화에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조지 레젠비가 연기했다. 그는 역대 본드 중 유일하게 영국(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를 포함해서) 출신이 아닌 배우다. 호주 출신인 조지 레젠비는 또한 본드 시리즈중 유일하게 단 한 편만 본드를 연기한 배우다. 많은 사람들에게 실패작 본드로 불리기도 하는 티모시 달튼도 두 편의 본드 영화에 출연했건만.

무엇보다도 줄거리는 가장 본드스럽지 않은 요소다. 여왕폐하대작전에서는 본드가 사표를 쓰고 은퇴하며,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해서 눌러 앉는 극도로 본드답지 않은 일을 한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난다.

이런 여왕폐하대작전의 독특함은 지금 이 영화를 다시보는 관객들 보다는 당시의 관객들에게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그들은 다섯번의 숀 코넬리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본 후여서 숀 코넬리와 제임스 본드가 동일시 되던 시기에 모델이자 자동차 세일즈 맨이었던 새파란 29세짜리 호주 사나이가 제임스 본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영화를 본 것이다.




조지 레젠비에 대한 평가도 많이 엇갈리는 편이다. 우선 그가 숀 코넬리에 비해서는 강한 남자의 인상이 매우 떨어지고, 로저 무어에 비해서는 여유와 유머가 매우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지 레젠비는 강함과 여유를 동시에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며, 부족한 부분을 멜로 연기 능력으로 막아낼 수 있다.

이것은 여왕폐하대작전이라는 독특한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는 딱 들어맞는 요소였다. 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교류와 비극적 결말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조지 레젠비는 완벽했다. 자기를 구해준 트레이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과 비탄에 빠진 마지막 장면의 제임스 본드 다우면서도 멜로 연기가 되는 모습은 결코 숀 코넬리나 로저 무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모든 면에서 볼 때 앞의 시리즈와 뒤의 시리즈의 존재하에서만 설명되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특별 번외편 같은 영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영화의 스토리와 유머, 상징과 장면이 갖는 가치란 없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이 아니라 다른 스파이가 나오고 모든 줄거리와 장면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전혀 다른 가치의 이상한 영화가 되어버린다.



물론 제임스 본드 영화 고유의 매력도 충분하다. 주 배경이 되는 아우수부르크의 산정 레스토랑 건물은 확실히 탈속적인 멋이 있는 공간이다. 스위스 알프스의 유려한 경치에, 이후로 그지없이 난무한, 만년설에서의 스키 장면을 처음으로 시도한 원조 에피소드도 이것이다. 60,7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중에서는 제임스 본드의 액션도 가장 자연스럽게 꾸며진 편이며, 제임스 본드의 장인이 되는 드라코 같은 인물의 묘사와 제임스 본드의 숙적 블로펠트 역시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많이 즐겨본 팬에게 오히려 더욱 독특하고 신기한 재미와 제임스 본드의 이면에 흐르는 감성을 보여줄 분명히 멋진 영화다. 제임스 본드가 진정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MI6를 떠나 은퇴한다. 그 결혼식 장에서 하객으로 참가한 M과 Q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결혼식에서 행복하게 떠나는 제임스 본드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흘리는 머니페니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특별편은 특별편일 뿐이어서, 조지 레젠비는 이 단 한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만 참여했고, 이 영화이후 20편의 정식 시리즈가 만들어진 제임스 본드 영화 40주년까지 이런 성격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단 한 편도 더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시 여유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저 차갑게 멋진 스파이로서의 제임스 본드만이 쓸쓸한 여왕폐하대작전의 추억을 뒤로 한 채 계속되는 것이다.


그밖에...

이 영화는 140분에 걸쳐 펼쳐집니다. 이것은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 가장 긴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임스 본드는 비탄에 빠져 슬퍼하는 연기를 합니다. 레젠비는 성공적으로 연기해서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장면을 찍고나서, 감독인 피터 헌트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이 장면을 찍도록 했고, 지금 영화에서 보는 장면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단 두번의 촬영 만으로 이 장면이 만들어 졌는데, 이유에 대해 피터 헌트는 다음과 같이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임스 본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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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marlowe 2005/08/08 11:38 # 답글

    반갑습니다. 다양한 시도를 했는 데 실패를 해서, 아쉬움이 남는 영화입니다.
    저는 코네리가 여기까지 출연하고, 다음 작품에서 다른 배우로 교체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게렉터 2005/08/26 16:59 # 답글

    그러면, 아마 지금같은 번외편 내지는 외전 느낌이 나지 않고, 깔끔한 마무리 느낌이 났을 겁니다. 그것도 멋지겠습니다.

    저는 이 약간 인기없는 듯한 번외편을 또 즐기기도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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